종이학 - 10년 후
1.

어린 시절,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불치병에 걸린 어느 소녀 팬의 사연을 담아 '천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이라 표현했던 가수 전영록의 <종이학>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던 바로 그 시절이다.

설마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믿고 싶었다.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천 번을 접는 정성으로 기원하는 소원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장난감 갖고 싶다는 수준은 될 수 없을 텐데... 그럴 만도 했던 것이, 당시 내겐 종이학 접기가 종이배나 종이비행기 접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어려웠기 때문이고, 그 어려운 종이학을 백 마리도 아닌 천 마리를 접는다는 건 내가 어떤 소원을 품건 간에 쉽게 할 수 없을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이다.

'아무나 못 할 거야. 그거 접을 시간에 차라리 소원을 이루기 위한 뭔가를 하는 게 낫겠지.'

어찌보면 나이답지 않게 꽤나 현실적인 결론을 내린 셈인데, 그게 그런 게 아니란 것을 7년쯤 뒤에 아주 가까운 사람을 통해 알게 됐다. 첫 번째 대학 시험에서 낙방하고 재수의 길을 택한 아들을 위해서, 어머니는 천 마리도 아닌 자그만치 4천 4백 마리나 되는 종이학을 접으시며 아들의 합격을 기원해 주셨던 것이다.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니까 단순 계산만으로도 소원 네 가지가 이루어질 수 있는데 어머니는 소원 네 가지를 한 곳에 올인(?) 하신 셈이었으니 내가 또다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순 없었을 게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었고, 어머니로 인해 종이학 천 마리 접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종이학 천 마리를 접을 수 있을까 라는 자문에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또는, 학을 접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 라는 의문도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해 내기를 소망할 때는 해 내는 데 필요한 노력을 해야지 기원만 하고 앉아서는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내 노력이나 기원과는 차원이 다른 그 무엇에 의해 결말이 난다는 것 또한 일찌감치 알고 있어서였으리라. 그래서였는지 시험 준비를 할 때도 차라리 책을 한 자 더 들여다봤지 학을 접지도 않았고, 모든 것을 갖고 싶었던 누군가를 연모할 때도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학을 접지도 않았다. (말인즉 맞지만, 나도 참 dry했다. -_-)

그랬던 내가 학을 접으려 마음먹게 된 일이 일어났다.


2. 

이젠 넉 달 전 일이다. 휴가를 받아 귀국을 며칠 앞두고 있던 일요일 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속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올 수 없니?" 
"무슨 일 있으세요?" 
"아부지, 암이시랜다." 
"네?" 
"폐암, 말기래."

전화를 끊었다. 멍했다. 정신을 차리자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나는 책상 옆의 종이를 들고 학을 접기 시작했다. 서울에 돌아가는 비행기 속에서도 접었고, 건강해 보이시는 아버지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브라질에 돌아와서도 접었다. 

'종이학 천 마리. 엄두가 안 나는 숫자지만, 난 지금 백일기도하는 거다. 하루에 열 마리씩만 접으면 백일이면 천 마리를 접을 수 있다.' 

지구 반대편, 멀리 있기에 아버지가 어떻게 투병하시고 계신지 알 수 없는 아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고작 그것 뿐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게다. 냉정히 말해 결국엔 자기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엇이 됐건 나는 매일 그렇게 학을 접으며 아버지를 살려달라 기도했고,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하지 않으시길 기도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아버지와 함께 만든 추억을 생각했다. 


3.

"왜 자꾸 전화하냐? 전화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그럼 애비가 낫기라도 하냐?"

두 달 전 쯤 전화를 통해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마지막 육성이다. 참 어지간하셨는데, 그 전엔 이런 말씀도 있었다.

"너에겐 큰일일지 몰라도 누구나 겪는 평범한 일이기도 하다. 남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거다. 생활은 정상적으로, 전과 다름 없어야 한다."

"애비가 잘못되더라도 한국 오지 말라 하려 했었다. 너 온대 봐야 어차피 임종은 못하는 거고, 기껏해야 발인날에나 오지 않겠냐? 그러려면 뭐하러 오냐? 애비는 이미 죽고 없는데."

"애비 걱정한다고 낫는 거 아니다. 일이나 열심히 해라."

이런 아버지셨다. 대쪽같고, 엄하셨다. 어릴 땐 혼도 많이 나고 매도 많이 맞았지만, 그래서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왜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하셨던지를 꽤 잘 헤아릴 수 있다. 

신이 인간을 하나 하나 사랑하시지만 실제 세상에 내려보내고 나면 그 마음처럼 일일이 돌보실 수는 없다 한다. 그래서 신의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아 줄 사람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게 바로 부모라는 말이 있다. 그 부모가 자식에게 품고 있는 마음은 결국 사랑일 것이다. 자식에 대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 사랑 말이다. 

그 안경으로 바라보면, 아버지와의 모든 추억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학을 접으며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수그리곤 했다. 신을 대신하여 신의 마음으로 세상에서 나를 사랑해 주신 분과의 이별은, 여러 말 할 것 없이 '슬픈 일'이다. 아무리 그것이 불가피하고 예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4.

내가 접는 학의 수가 늘어갈수록 아버지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학을 접는 속도가 빨라졌고, 종이학에 떨구는 눈물이 잦아졌고, 내 기도는 점점 간절해졌지만, 한편 점점 힘을 잃어가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더 절실히 매달렸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 전,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아무래도 와 봐야겠어."

어차피 임종은 못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살아 계실 때 마지막으로 뵈어야 할 상황이 되면 올 테니 그 때가 오면 귀띔해 달라고 동생에게 해 둔 말이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그 말끝에:

"전에 오빠 부르겠다 그러면 아빠가 펄펄 뛰며 그러지 말라 그러셨는데, 오늘은 아무 말씀 안하시고 눈만 껌벅껌벅했어."

자식을 보고 싶은 것 이상의 그리움이 세상에 있을까? 
없다. 

학을 들고 비행기를 탔다. 천 마리에서 서른 마리 정도가 모자란 상태였고, 나는 비행기에서도 계속 학을 접었다. 그런데, 전에는 그렇지 않던 학 종이가 접으면서 찢어지는 일이 몇 마리에 한 번 씩 일어났다. 불안한 마음에 갈아타는 도시에서 전화를 했었고, 아직 아버지는 살아 계셨다. 서울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서도 종이는 자꾸 찢어졌지만, 가지고 있던 종이를 모두 접어 학은 1,036마리가 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생각해보면 내가 마지막 남은 종이로 마지막 종이학을 접었던 그 즈음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신 듯하다. '아들이 기도를 많이 했으니 기운차리세요' 라는 말씀을 드리며 보여드리고 싶었으나, 내가 접은 학들이 아버지를 붙들고 날개짓하며 일으켜 세워 주기를 바랬으나, 결국 난 종이학 천 번을 접어 다른 곳도 아닌 아버지 영정 앞에 놓아야만 했다.



학을 접으며 빌었던 소원 한 가지는 조금이나마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비록 호흡곤란으로 힘겨워하셨지만 암성통증으로는 그 무엇보다 고통스럽다던 폐암의 무서운 통증으로부터는 비교적 자유로우셨던 듯했다. 

그렇지만, 어떻든 가장 바랬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셨으므로.



5.

나도 학 천 마리를 접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문득 예전 인연이 될 뻔 했던 여인이 생각나며 슬몃 미안해진다. 그땐 난 못한다고 했었는데 이제 보니 할 수도 있었을 듯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종이학 천 마리를 접어 보고 나니 나 자신의 구애를 위해, 또는 나 자신의 성취를 위해서라면 왠지모르게 종이학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보단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일 때 종이학이 비로소 어울리는 것 같다. 소원이 이루어지고 아니고는 차치하더라도. 

불치병에 걸린 소녀 팬을 위하는 마음으로 <종이학> 노래를 만들었다는 가수 전영록이, 그리고 아들의 합격을 바라는 마음으로 종이학을 접으셨던 어머니가 내겐 종이학을 그렇게 각인시킨 것 같다. 그래서인지, 투병 중인 아버지를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했을 때 선뜻 종이학을 떠올렸던 게 아닐까.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종이학 천 마리를 접은 것을 부질없는, 헛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종이학을 접으며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고, 아버지와의 추억들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기에. 그리하여... 머지 않아 나와 이별하려는 아버지와 함께 하고 있었기에. 

"(병환 소식을 들으니) 슬프네요."
"슬프긴. 우린 늘 마음으로는 함께이지 않았더냐. 네가 군대 있을 때도, 유학 가 있을 때도, 일 때문에 나가 있는 지금도. 
"..."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생전의 말씀 그대로, 그렇다, 마음으로는 늘 함께일 것이니. 

   




Sleepless in SP



p.s. 

유언 한 마디 따로 남기지 않으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내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었을지도 잘 알 것 같다.

아부지, 어무이는 걱정마세유. 잘 모실게유.



by Gabriel | 2011/12/21 01:44 | Memoria de Musica | 트랙백 | 덧글(0)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